호치민 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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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정일
작성일20-10-26 17:09
조회53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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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에서 미국의 패전 요인은 결코 군사적으로 무능해서가 아니고, 모국에서 의 지원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전쟁이 부도덕해서였던 것도 아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졌던 이유는 우리는 이 전쟁을 '힘'에 의존해 싸운 반면 그들은 '열정'에 의존해 싸웠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Callaway의 회고록 'Mekong First Light'에 있는 말이죠.
역사인물열전, 오늘은 오로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의 한길에 불꽃같은 열정을 다 바친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에 대해 살펴볼까요.
1.출생과 어린 시절
1890년 베트남 중부 호앙쭈에서 태어난 호치민, 그의 아버지는 어렵게 공부하여 박사학위까지 땄지만 식민지 관료체제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아내의 죽음을 핑계로 조정의 관직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의식 있는 지식인이었죠.
그의 이름은 160여 개가 넘는데, 호치민(胡志明, 빛을 밝히는 이)은 1940년 혁명 전쟁 당시 중국 기자로 행세하면서 쓴 이름이죠.
어린 시절 이름을 바꾸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이지만, 그는 늘 경찰에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명을 썼고, 이 수많은 이름 속에 그의 전 생애가 상징적으로 들어 있죠.
엄동설한의 초라함이 없다면
따스한 봄날의 찬란함도 결코 없으리.
불운은 나를 단련시키고
내 마음을 더욱 굳세게 한다.
그가 옥중에서 쓴 '스스로 권면하며'라는 글인데, 평전을 보니 그는 정말 엄동설한의 초라함보다 더한 어려운 시절을 보낸 듯··
2.프랑스 유학
1911년 그는 발전된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증기선 트레빌호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가죠.
이후 그는 런던과 뉴욕에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화부(火夫) 등으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와 민족주의적 가치관은 급속하게 성장하죠.
절굿공이 아래서 짓이겨지는
쌀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러나 수없이 두들김을 당한
다음에는 목화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인간사도 때로는 이와 같아서 역경이
사람을 빛나는 옥으로 바꾸어 놓는다.
결국 수많은 역경에 의해 빛나는 옥으로 변한 그는 1919년 1차 대전이 끝난 후 베르사유 회의에 베트남 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여 일약 유명해지죠.
물론 윌슨을 비롯한 평화회의 중재자들은 그의 호소를 철저히 무시했지만··
3.공산주의 활동
1920년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한 그는 프랑스 공산당 창립과 함께 그 당원이 되죠.
그 후 1924년 모스크바에서 약 2년간 머물면서 공산 혁명사상을 익힌 그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어 조국 베트남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죠.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1930년 드디어 그는 조국을 떠난 지 20년 만인 나이 마흔에 홍콩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이념을 지향한 '베트남 공산당'을 결성하죠.
그러나 민족주의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코민테른의 비판에 그는 결국 공산주의의 원래 이념에 좀 더 충실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바꾸게 되는데··
"시야는 넓게, 생각은 치밀하게, 때때로 공격은 단호해야 한다. 길 잘못 들면 쌍차(雙車)도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卒) 하나로도 성공한다."
'장기를 배우며'라는 그의 옥중시인데, 이처럼 받아들일 것은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포용력, 확신이 서면 단호하게 실천에 옮기는 추진력, 이것이야말로 그의 성공 비결이 아닐지··
4.민족해방투쟁
"나는 광시 지방의 열세 군데 지역을 돌아다녔고, 열여덟 군데의 감옥 맛을 보았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계속 물었네. 민중에게 헌신했다는 죄라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2차 대전이 끝나자, 그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죠.
이후 그는 1946년 북베트남의 자치권의 범위를 정하는 퐁텐블로 회담이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직접 지휘하여 1954년 프랑스를 상대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근대들어 아시아 국가로선 최초로 유럽 열강을 패퇴시키는 전무후무한 승리를 거두지만,
구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하고, 결국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되죠.
이후 베트남은 극도의 정치불안에 휩싸이며 통일 전쟁이 시작되는데··
5.마치며
1969년 한창 전쟁 중에 그는 심장병으로 급사하는데, 그가 손으로 쓴 유언장에는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고 적혀 있었죠.
"베트남과 가장 마지막까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우리 미국 사람들도 작고 마른 호 아저씨에게 숭배와 존경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뉴욕타임즈)
“호치민! 이 지구상의 어떠한 민족 지도자도 적의 총칼 앞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집요하게 맞선 인물은 없었다.” (타임지)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언론은 그의 부고 기사를 대서특필했고, 그가 죽는 날까지 적군으로 싸웠던 미국의 언론도 위과 같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죠.
평생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조금의 안락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민족 해방의 한길로 매진한 호치민,
그의 유해는 방부 처리되어 그가 1945년 하노이의 50만 군중 앞에서 독립을 선언했던 자리에 지금도 누워 있는데, 영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죠.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영어, 불어, 러시아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한 글로벌 공산혁명가 호치민,
마른 몸매, 약간 겁먹은 듯한 베트남인 특유의 큰 눈, 한없이 인자하고 부드러운 표정의 친근한 이웃 아저씨 같은 호치민,
이념을 초월하여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지··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남북 분단, 유교문화권, 젓가락 문화 등 베트남과 우리 사이엔 공통점이 너무 많은데,
그럼에도 베트남은 통일이 되고 우리는 아직도 분단 상태니 그 결정적 차이의 원인이 과연 무엇인지··
"어려운 것이 뭐 있겠는가? 인내심만 있다면, 산을 파내고 바다를 채우는 것도 뭐 못할게 있겠는가? 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법··"
베트남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는 그의 말인데, 인내가 쓸수록 그 열매가 단 것은 만고의 진리가 아닐지··
부족한 이 글은 미군의 용병 등 온갖 멸시를 당하면서도 젊은 피를 오로지 조국 재건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베트남 참전 용사들에게 바치며, 혹시 호치민에 대해 본의 아닌 미화가 있더라도 널리 이해를 구합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Callaway의 회고록 'Mekong First Light'에 있는 말이죠.
역사인물열전, 오늘은 오로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의 한길에 불꽃같은 열정을 다 바친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에 대해 살펴볼까요.
1.출생과 어린 시절
1890년 베트남 중부 호앙쭈에서 태어난 호치민, 그의 아버지는 어렵게 공부하여 박사학위까지 땄지만 식민지 관료체제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아내의 죽음을 핑계로 조정의 관직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의식 있는 지식인이었죠.
그의 이름은 160여 개가 넘는데, 호치민(胡志明, 빛을 밝히는 이)은 1940년 혁명 전쟁 당시 중국 기자로 행세하면서 쓴 이름이죠.
어린 시절 이름을 바꾸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이지만, 그는 늘 경찰에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명을 썼고, 이 수많은 이름 속에 그의 전 생애가 상징적으로 들어 있죠.
엄동설한의 초라함이 없다면
따스한 봄날의 찬란함도 결코 없으리.
불운은 나를 단련시키고
내 마음을 더욱 굳세게 한다.
그가 옥중에서 쓴 '스스로 권면하며'라는 글인데, 평전을 보니 그는 정말 엄동설한의 초라함보다 더한 어려운 시절을 보낸 듯··
2.프랑스 유학
1911년 그는 발전된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증기선 트레빌호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가죠.
이후 그는 런던과 뉴욕에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화부(火夫) 등으로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와 민족주의적 가치관은 급속하게 성장하죠.
절굿공이 아래서 짓이겨지는
쌀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러나 수없이 두들김을 당한
다음에는 목화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인간사도 때로는 이와 같아서 역경이
사람을 빛나는 옥으로 바꾸어 놓는다.
결국 수많은 역경에 의해 빛나는 옥으로 변한 그는 1919년 1차 대전이 끝난 후 베르사유 회의에 베트남 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여 일약 유명해지죠.
물론 윌슨을 비롯한 평화회의 중재자들은 그의 호소를 철저히 무시했지만··
3.공산주의 활동
1920년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한 그는 프랑스 공산당 창립과 함께 그 당원이 되죠.
그 후 1924년 모스크바에서 약 2년간 머물면서 공산 혁명사상을 익힌 그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어 조국 베트남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죠.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적인 이론이 될 수 없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1930년 드디어 그는 조국을 떠난 지 20년 만인 나이 마흔에 홍콩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이념을 지향한 '베트남 공산당'을 결성하죠.
그러나 민족주의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코민테른의 비판에 그는 결국 공산주의의 원래 이념에 좀 더 충실한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바꾸게 되는데··
"시야는 넓게, 생각은 치밀하게, 때때로 공격은 단호해야 한다. 길 잘못 들면 쌍차(雙車)도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卒) 하나로도 성공한다."
'장기를 배우며'라는 그의 옥중시인데, 이처럼 받아들일 것은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포용력, 확신이 서면 단호하게 실천에 옮기는 추진력, 이것이야말로 그의 성공 비결이 아닐지··
4.민족해방투쟁
"나는 광시 지방의 열세 군데 지역을 돌아다녔고, 열여덟 군데의 감옥 맛을 보았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계속 물었네. 민중에게 헌신했다는 죄라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2차 대전이 끝나자, 그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죠.
이후 그는 1946년 북베트남의 자치권의 범위를 정하는 퐁텐블로 회담이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직접 지휘하여 1954년 프랑스를 상대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근대들어 아시아 국가로선 최초로 유럽 열강을 패퇴시키는 전무후무한 승리를 거두지만,
구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하고, 결국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되죠.
이후 베트남은 극도의 정치불안에 휩싸이며 통일 전쟁이 시작되는데··
5.마치며
1969년 한창 전쟁 중에 그는 심장병으로 급사하는데, 그가 손으로 쓴 유언장에는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고 적혀 있었죠.
"베트남과 가장 마지막까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우리 미국 사람들도 작고 마른 호 아저씨에게 숭배와 존경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뉴욕타임즈)
“호치민! 이 지구상의 어떠한 민족 지도자도 적의 총칼 앞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집요하게 맞선 인물은 없었다.” (타임지)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언론은 그의 부고 기사를 대서특필했고, 그가 죽는 날까지 적군으로 싸웠던 미국의 언론도 위과 같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죠.
평생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조금의 안락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민족 해방의 한길로 매진한 호치민,
그의 유해는 방부 처리되어 그가 1945년 하노이의 50만 군중 앞에서 독립을 선언했던 자리에 지금도 누워 있는데, 영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죠.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영어, 불어, 러시아어 등 7개 국어에 능통한 글로벌 공산혁명가 호치민,
마른 몸매, 약간 겁먹은 듯한 베트남인 특유의 큰 눈, 한없이 인자하고 부드러운 표정의 친근한 이웃 아저씨 같은 호치민,
이념을 초월하여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지··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남북 분단, 유교문화권, 젓가락 문화 등 베트남과 우리 사이엔 공통점이 너무 많은데,
그럼에도 베트남은 통일이 되고 우리는 아직도 분단 상태니 그 결정적 차이의 원인이 과연 무엇인지··
"어려운 것이 뭐 있겠는가? 인내심만 있다면, 산을 파내고 바다를 채우는 것도 뭐 못할게 있겠는가? 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법··"
베트남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는 그의 말인데, 인내가 쓸수록 그 열매가 단 것은 만고의 진리가 아닐지··
부족한 이 글은 미군의 용병 등 온갖 멸시를 당하면서도 젊은 피를 오로지 조국 재건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베트남 참전 용사들에게 바치며, 혹시 호치민에 대해 본의 아닌 미화가 있더라도 널리 이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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