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사도세자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홍도야지관련링크
본문
혼정신성 다하지 못한 어버이 사모하여
오늘 또 화성을 찾아와 보니
원침(園寢)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고
재전에서 배회하는 그리운 마음 깊구나.
사흘 밤 견디기는 어려웠으나
그래도 초상화 한폭은 이루었다네.
지지대 돌아가는 길에 머리 들어
벽오동 같은 구름 바라보니 속마음 일어나누나.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돌아본 후 지은 추모시죠.
역사인물열전, 오늘은 부왕에게 사사된 비극적 운명의 인물,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해 살펴볼까요.
1.출생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오래 재위했던(각 83세, 52년) 영조, 그는 정성, 정순 등 왕비 2명과 영빈 이씨 등 후궁 4명을 두었지만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서만 2남 12녀를 두었죠.
첫 아들인 효장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9세로 요절했고,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 7년 뒤에 태어났는데, 그때 영조 나이 42세, 그의 기쁨은 당연히 매우 컸죠.
“삼종(三宗. 효종ㆍ현종ㆍ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고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감회 또한 깊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는데, 원자 정호(定號)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죠.
2.어린 시절
영조의 사랑과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사도세자, 여러 기록에 의하면 그는 3세 때부터 글자를 배울 정도로 매우 총명했죠.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
그는 특히 무인적 기질이 뛰어나 어릴 때부터 북원(北苑: 대궐 뒤쪽에 위치한 정원)에서 말을 달리면서 무예를 연마했는데, 그때 쓰던 청룡도와 쇠몽둥이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하네요.
“내가 동궁으로 있을 때는 거의 휴식할 겨를이 없었고, 두 차례의 연강(筵講)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 오늘 이후에는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篇)을 읽었고 어느 날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강관(講官) 등을 기록해 내가 볼 수 있도록 준비하라.”
영조 자신이 실천했던 이런 엄격한 규율은 호방한 무인적 기질의 세자에게는 무거운 규제가 되었고 이에 따라 둘의 사이는 조금씩 멀어져갔죠.
3.대리청정
사도세자가 15세 때인 영조 25년(1749)에 시작된 대리청정은 영조와 그의 관계에서 중요한 첫 번째 변곡점이 되죠.
전근대 왕정에서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는데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 실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한편 세자가 4살 때부터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미 5회나 양위 의사를 밝힌 영조는 대리청정이 시작된 후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을 더 일으키는데 그때마다 세자는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해야했죠.
결국 대리청정 이후부터 영조는 세자를 더욱 자주 질책했고, 세자는 부왕을 두려워하고 피하게 되었는데 그 결말은 결국 참혹한 비극으로 이어지죠.
4.임오화변(1762, 영조 38)
사도세자가 부왕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는 왕조 최대의 비극 임오화변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죠.
세자가 정신병으로 비행을 일삼아 영조가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였다는 전통적 견해(한중록 등)부터 당파 싸움의 억울한 희생양이라는 견해까지 수 많은 주장이 있지만 아직 정확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경언의 고변서는 물론 그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을 없애 버렸으니··
결국 진실은 'Only God knows'가 아니라 'Only 영조 knows'죠. (사도세자는 정확한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으니)
고장난명(孤掌難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
부자간의 갈등을 전적으로 어느 일방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저는 책임의 상당부분을 '정신병자(?)' 세자의 잘못보다는 '성격이상자' 영조의 책임으로 보고 싶네요.
평생 '천한 무수리 출신 후궁의 소생'이라는 콤플렉스와 '경종독살설'에 시달린 영조,
결국 위와 같은 그의 콤플렉스가 수 많은 원인 중 가장 중요한 원인이 아닐지··
아무튼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친어머니(영빈 이씨)는 고발하고, 장인(홍봉한)은 뒤주를 주어 후원하고, 부인(혜경궁 홍씨)은 친정의 입장만 변명하고, 결국 어린 세손(정조) 혼자만이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부르짖은 그의 외로운 죽음이 참으로 가슴아프네요.
선인문 앞 회화나무도 그 신음소리 때문에 구불구불 가지가 뒤틀렸다고 할 정도로 뒤주에 갇혀 고통과 회한속에 죽음을 맞아야만 했던 사도세자,
아무리 “정치는 비정하다", “권력은 부자 사이에도 나눌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엽기적인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권력무상(權力無常)'을 느끼게 되네요.
5.마치며
사도세자의 불행한 죽음 후 조정은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時派, 소론과 남인)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僻派, 노론의 대부분)로 나뉘는데 영조가 죽을 때까지 노론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죠.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옥좌에 앉자마자 한 첫 마디인데, 정조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장헌(莊獻)세자'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소와 사당을 영우원(永祐園)과 경모궁(景慕宮)으로 고치죠. (그 뒤 묘소는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되어 수원으로 옮겨지죠)
그 후 사도세자는 고종 36년(1899) 국왕(장종)을 거쳐 황제(장조 의황제)로 추존됨으로써 사후나마 지존의 자리에 오르게 되죠.
"나는 침실 이름을 새로 지어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이라 하노라. 동이거나 서이거나, 남이거나 북이거나, 시거나 짜거나, 느슨하거나 준엄하거나 따지지 않고, 오직 인재를 선발하고 취하여 온 세상이 함께 협력함으로써, 모두 대도(大道)에 이르러 길이 화평(和平)의 복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정조, 일득록)
28세의 꿈같은 목숨이 뒤주에 갇혀 당쟁의 제물로 사라진 비운의 사도세자,
해는 동쪽에서 솟아 사해(四海)를 밝히고
달은 중천에 솟아 만산(萬山)을 비추도다.
그가 10살에 지은 시인데 제왕의 웅혼한 기상이 물씬 풍기는 시죠.
하늘의 해와 달처럼 어느 특정 지역이나 특정 당파가 아니라 사해와 만산을 비추고자 했던 사도세자,
다시는 이 땅에 혈연, 지연, 학연 등 무익한 당파싸움으로 인해 그와 같은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